어떤 21세기의 풍경

2019년 1월 21일

서현석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니세포르 니엡스에 의해 헬리오그래프가 발명되고 다게레오타이프로 상용화되었을 때 회화의 대표적인 장르들이 매체를 갈아탔다. ‘인물’이 그랬고, ‘정물’이 그랬고, ‘풍경’이 그랬다. 초기의 사진작가들은 회화의 대체물로서 다게레오타이프를 다뤘다. 반면 영화는 회화-사진의 장르 구분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시네마토그래프가 발명되고 나서 도시의 정경을 보여주는 액추얼러티 영화(actuality film)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후 문학 및 연극과 깊은 인연을 맺은 영화의 행보에서 결국 풍경은 자리를 찾지 못했다. 움직임은 회화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요구했다. 라울 루이즈 감독이 말한 “풍경으로의 회귀본능,” 그러니까 고전적 문법을 갖춘 극영화가 인물들로부터 멀어지며 내러티브를 완결하는 관습에서 풍경의 희미한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루이즈 감독도 그러한 ‘회귀본능’이 21세기에 새로운 날개를 달게 되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날개란 최근 보편화된 드론이다. 드론은 영화에 풍경을 복원한다. 영화만의 방식으로 풍경을 복원한다. 영화가 발명된지 130년이 지난 시점이다.

강민수 작가의 설치 작품을 구성하는 두 개의 비디오 스크린이 전람하는 것은 드론이 소환하는 풍경의 유전자다. 그것은 작가가 직접 드론으로 촬영한 제주도의 풍경이다. 두 개의 스크린은 대칭구도를 이루며 양 옆에 배치된 두 개의 거울과 더불어 네 폭짜리 그림 혹은 병풍과도 같은 구조를 완성한다.

두 스크린에는 세 편으로 나뉜 영상들이 연이어 나온다. 각기 2+02, 2+03, 2+04라는 제목을 가진 영상들은 영상의 가장 기본적인 메체적 정체성에 충실하다. 즉 카메라 앞의 현실을 기록하는 기능이다. (그러한 면에서 제임스 베닝의 미학이 공명한다.) 하지만 그동안 영화의 역사가 꾸준히 보여주었듯, 카메라의 존재감이 ‘중립’을 지향할 때에도 프레임 안의 미장센은 언제나 유기적인 의미의 층위들을 제조하고 배합한다. 두루마리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강민수 작가의 풍경은 바다, 언덕, 나무와 같은 자연물들을 비롯하여 집과 논밭, 도로, 골프장, 풍력 터빈 등 인간에 의해 변화한 섬의 지형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공장이나 쓰레기 처리장, 건축자재 저장소, 채석장, 변전소 등, 제한된 땅 위의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함축하는 도상들이 복잡하고 정교한 풍경을 형성한다. 그 광경은 이 섬 위의 인간 생태계를 함축적이고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관점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이지만, 프레임 안팎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구조물들이 이루는 총체적 지형은 인간 생태계에 대한 ‘단면’에 가까워진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건축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장치들이 그 층과 결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는 ‘제주도’라는 뭍사람들의 관념과 기묘한 긴장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관광지’로서의 이미지와 조용히 대립하기도 하고 통념 속의 ‘제주도’에 구체적인 디테일을 보태기도 한다.

드론 이미지는 풍경이자 곧 정보다. 구글맵 거리뷰 혹은 위성사진이 공간을 ‘정보’로 평면화하는 것과 흡사하지만, 드론은 풍경의 미학을 더불어 취한다. 오늘날 행정적 목적에 따라 드론이 활용되는 것과 흡사하게 강민수 작가의 드론 이미지 역시 제주도를 이루는 다양한 자연물과 인공물들을 먼 시선으로 포착한다. 그것은 드론의 정적인 비행을 풍부한 정보의 홍수로 전환한다. 이로써 회화로부터 빌려오는 미학적 가치와 산업사회에서 활용될만한 정보 가치는 절묘하게 섞인다. 이는 오늘날의 “정보사회”의 모든 이미지가 대면해야 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망각되었던 풍경의 가능성은 이제 우리에게 하나의 존재론적인 질문을 전가한다. 정보는 어떻게 미학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곳저곳에서 촬영된 ‘새의 관점’이 열거되면서 ‘제주도’라는 하나의 자체 완결적인 실체가 서서히 형태를 갖춰간다. 드론이 제주도의 ‘모든 것’을 스캔하여 보여줄 수는 없지만, 부분은 전체에 대한 은유가 되어 ‘제주도’라는 심상을 차곡차곡 만들어간다. 자체 완결적 구조로서의 제주도는 네 개의 스크린/거울과 이를 지탱하는 비계(일명 아시바)로 이루어지는 상영 공간의 독립적 구조에 상응하고, 또 그에 의해 지지된다. 이는 곧 작품의 형식이자 물리적 기반이다. 디지털 풍경이 정보와 미학의 간극에서 위태롭고도 화려한 비행을 지속하면서 감각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형식에 의해 이미지가 지지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민수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드론 이미지를 재료로 활용, 다차원적인 구조를 만들고, 공간을 입체적인 공감각적 형식으로 재구축한 셈이다.

물론 제주도의 ‘자체 완결성’은 환상이다. 작가가 강조하는 풍경의 요소들은 온전한 하나의 총체성으로 완성되어가는 ‘제주도’라는 심상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변형을 가한다. 작품은 구성과 해체의 방향성을 동시에 취하는 셈이다. 고전영화가 실재와 환영의 간극에서 진동하는 것과 흡사한 양가성이 발생한다. 이의를 제기하며 형식으로 침투하는 대표적인 미장센의 요소는 북쪽 해안의 변전소다. 그것은 백 프로 제주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전력 생산을 보완하기 위해 뭍으로부터 전력을 수신하는 장치다. 그곳으로부터 두 갈레로 갈라지는 송전탑의 줄기는 한라산을 돌아 서귀포로 향한다. 북쪽 해안으로부터 멀어지는 드론은 송전탑들로 이어지는 전선을 따라가며 제주도의 삶의 기반을 가시화한다. 강민수 작가는 제주도가 소비하는 전력의 40%가 육지로부터 바다를 통해 제공되며, 변전소라는 존재 자체가 “에너지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포화 상태인 인구와 자본화된 섬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강민수 작가가 제주도에 다섯 달 동안 머물면서 접근한 생태계의 현실은 ‘자연’이나 ‘친환경’으로 포장되고 모든 것들이 ‘관광’ 자원으로 재순환되는 제주도의 이면에서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작동하고 있다. 풍력 발전만 하더라도 ‘친환경’적인 대체 에너지 자원으로 홍보가 되었고 심지어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는 가능성까지 떠오른 바 있지만, 육지에 설치된 터빈들이 기존의 생태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스케일로 풍경에 개입, 시선을 흡입하며 우리의 감각적 적응을 강요한다.

제주도의 생태계적 구조를 드러내며 운율처럼 반복되는 또 하나의 형식적 모티브는 쓰레기매립장이다. 제주도 전역에 걸쳐 네 곳에 쓰레기매립장이 설치되었다. 육지로 쓰레기를 실어 나를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세 곳의 쓰레기매립장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전력은 육지에 의존하되 쓰레기 처리는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결국 끊임없는 개발과 재개발로 이어지는 제주도의 현재와 미래를 총체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이 구조물들은 골프장이나 리조트 호텔과 같은 ‘관광지’의 틈새에서 제주도의 경제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표상으로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다. 드론 이미지는 이렇듯 디테일들에 내포된 자본과 개발의 현실적 층위들을 세밀하게 주시하면서 우리의 시선에 탐색의 의무를 부여한다. 작가의 말대로, “안정된 세계는 허구로 존재한다.”

통시적인 불안정성과 더불어 21세기의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역사의 흔적이다. 드론으로 제주도를 내려다볼 때 의도가 어찌되었든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4.3 항쟁의 상흔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4.3평화공원이나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원형의 공동묘지는 특히나 작가가 의도적으로 환기시키는 과거의 도상이다. 이밖에도 드론의 시선은 동백동산 위를 가로지르면서 주변과의 지형적인 충돌을 아이러니처럼 드러낸다. ‘먼물깍’은 과거 식수로도 사용되었던 습지로, 4.3 사건 당시 물을 구하기 위해 은신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다. 풍경의 한 구석을 점유하고 있는 이 순진한 자연물은 호기심 어린 시선이 현재를 넘어 시간의 주름을 응시하게끔 한다.

드론 이미지는 아무런 효과나 치장 없이, 그리고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건조하게 섬 위를 부유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조감을 이어가지만, 그 평범함이야말로 우리가 숨쉬는 현실의 생태계적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평범함 속에는 우리의 삶을 자본에 영속시키는 장치들이 숨어 있다. 우리의 면역된 시선이 그 의뭉스러움을 묵인할 뿐, 풍경의 위태로움은 우리의 일상 깊숙한 곳을 잠식하고 있는 게다. 시인 이상이 획 하나를 결격시켜 조감(鳥瞰)에 내재된 오감(烏瞰)의 불온함을 드러내듯, 강민수 작가는 지극히 간단한 구조 속에 내재된 결핍의 단초를 가시화하여 총체적이고 존재론적인 불안정함을 추출한다.

결국 세 편의 2채널 영상은 기억과 미래, 허구와 진실, 아름다움과 불안 등 현실의 외양과 그 이면에 도사리는 중층적인 의미들로 이루어지는 ‘내러티브’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쓰레기 처리장, 골프장, 채석장, 풍력 터빈 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설치물들은 모티브가 되어 건조하게 표류하는 이미지에 반복과 변형이라는 형식적 구성을 부여한다. 단순함과 세밀함이 교류하는 이러한 구조의 커다란 분절을 이루는 것은 부유하는 흐름을 세 개의 섹션으로 나누는 단순한 플릭커(flicker) 효과다. 마치 기계적 결함처럼 보이기도 하는 점멸효과는 발작을 일으키듯 시선을 불안정하게 떨게 하면서도 동시에 작품이 관통하는 시간의 긴 궤적을 구획화한다. 강민수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이러한 불안정이 제주도의 불완전한 전력공급 상태에 상응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오작동’의 시뮬레이션은 현실에 대한 은유나 지표이기 이전에 형식적인 대체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병풍/사면화를 이루는 두 개의 스크린이 영상이 아닌 거울로서 공백을 지니는 것에 상응하기도 한다. 구조는 감각을 만든다.

결국 영상과 거울을 네 개의 면으로 전람하는 비계 구조가 집의 형상을 닮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은 감각을 성립시키는 ‘구조’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형상화한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했듯, 집은 사유의 기반이자 형식이다. 제주도를 하늘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은 21세기에 사유가 바슐라르의 향수어린 제안으로부터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다층적인 사회적, 역사적 단면으로서의 풍경이 우리를 유도하는 사유의 방식은 단순한 안식처로서의 ‘집’에 귀속되는 안정지향적인 철학이 아니라 불안정한 허공을 부유하는 결핍의 지형학이다. 공중 산책자의 ‘기반 없는’ 감각이다. 하룬 파로키의 작품이 그러하듯, 강민수 작가의 작품은 영상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풍경이 영화와 다시 연을 맺게 되자 우리는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는 ‘풍경’을 이해하는 방식을, 무빙 이미지를 ‘보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 리뷰는 貳衙室錄-下(이아실록-하) 도록에 기재되었습니다.
 


© Kang Minsoo